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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육사- 웨스트 포인트

自由人 2017. 10. 26. 05:45
 



美육사- 웨스트 포인트에서 朴正熙.

                                 -2017.10.23 08:08:33 -

                                   - 웨스트포인트에서 -

                                          - 월간조선 -

 

박정희의 일본 '비밀방문' + 미국 방문 '현대판 조공책봉'
1965년 5월18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존슨 대통령과 워싱턴의 요인들을 초청한 리셉션을 가졌다. 박대통령은 리셉션이 끝나자마자 한국대사관으로 달려가 밤 9시부터 재미동포들을 위한 만찬회를 베풀었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한국국적의 동포는 1만2643명이었다. 이 가운데 7876명이 영주권을 갖고 있었고 유학생은 4233명.

박대통령은 "만리이역에서 고생하는 여러분들은 지금 내 조국, 내 집안의 되어가는 사정에 몹시 안타깝게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서두를 꺼낸 뒤 이렇게 연설했다.

"이제 우리도 꼭 한번 잘 살아 보아야겠다, 다시는 남을 쳐다보거나 구걸을 안해야겠다는 피맺힌 결심 속에서 분연히 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우리의 걱정은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잘 키워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런 걱정은 후진국가 모두가 겪고 있는 공통의 고통입니다. 나는 여기에 도달하는 첩경은 중용지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자제와 책임, 권리와 의무의 한계가 분명한 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조국이 못살고 가난하다 해도 조국은 조국이요, 부모는 부모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반드시 이룩해야만 우리의 후손에게 영광있는 조국을 인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5월19일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백악관에서 험프리 부통령의 환송을 받은 뒤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특별기편를 타고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20여대의 모터사이클이 경호하는 가운데 뉴욕시내로 들어갔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는 25분간의 카 퍼레이드는 고층건물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오색 종이들 속에서 진행되었다. 박대통령은 잘 연출된 환영에 기분이 좋았다.

박대통령 일행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들었다. 다음날 박대통령은 뉴욕에서 열리고 있던 세계박람회장을 둘러보았다. 한국관을 구경하면서 박대통령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날 한미재단이 주최한 오찬에는 소설가 펄 벅 여사, 맥아더 장군의 미망인, '순교자'란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재미동포 리처드 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주미한국대사 양유찬 같은 인사들이 참석했다.

양유찬은 퇴장하는 박대통령을 붙들고 계속 이야기를 걸었다. 박대통령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이후락 비서실장이 가운데 들어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이실장은 주미한국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할 때 양대사를 모신 적이 있었다. 한 기자가 "양대사가 모처럼 박대통령과 이야기를 하겠다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따지듯이 묻자 이실장은 "눈치가 빠르긴, 그런 일 없어요"라면서 웃었다.

5월20일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우탄트 총장을 면담한 박대통령은 그 직후 '한국의 유엔가입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부조리의 지속상태는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이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일행은 유엔총회장을 참관했다. 박정희는 소련 대표 자리를 가리키면서 "저기서 흐루시초프가 구두를 들고 책상을 쳤겠군"이라고 농담을 하더니 "우리 대표자리는 어디인가?"라고 물었다. 안내자가 옵저버석을 가리키자 "빨리 저 한복판으로 옮겨야 할텐데"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다음날 뉴욕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웨스트 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미공군 특별기를 타고 찾아갔다.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그리고 조선경비사관학교 등 3국의 육사를 모두 졸업한 경력을 가진 박대통령은 군사문화에 익숙한 체질 때문인지 이 방문을 아주 즐겼다. 의장대 사열을 받기 직전 이곳에 사는 것으로 보이는 동포여성 한 사람이 박대통령을 붙들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박대통령은 생도들을 앞에 두고 짤막한 연설을 했다.

"역사상에는 동일한 연대에 대등한 무력이 등장하고 전쟁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어느 쪽의 무력이 일시적으로 강대해지더라도 정의를 함께 하지 아니한 무력은 끝내 처참하게 패망했습니다. 이런 진리를 부정하고 오로지 폭력만으로써 인류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폭력은,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 폭력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런 면에서도 본인과 한국 국민이 계속하고 있는 반공투쟁이,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학교당국은 이곳을 방문하는 국가원수에게만 주는 특권 하나를 박대통령에게 드리겠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오전에 운동장을 시찰하다가 20여명의 사관생도들이 벌로써 특별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한 기억이 났다. 박대통령은 벌을 받고 있는 한 생도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었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특권으로써 지금 교정에서 벌을 받고 있는 생도들을 모두 사면하는 바입니다."

생도들은 함성을 올리면서 식탁을 꽝꽝 소리나게 쳤다. 생도들은 박대통령이 웨스트 포인트를 떠날 때는 모자를 일제히 벗어 하늘로 높이 던져 환송했다. 박대통령은 며칠 뒤 동양통신 김성진(뒤에 청와대 대변인 및 문공부 장관 역임) 워싱턴 특파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미국방문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두 가지야. 하나는 푸른 숲, 다른 하나는 웨스트 포인트에서 만난 생도들의 늠름한 모습과 젊은 기개야. 내가 미국에서 가져가고 싶은 것이 저 푸른 숲이야. 나라라는 것은 이렇게 푸르러야 미래가 있는 거야."

푸른 숲과 생도들의 기개를 높게 평가한 박정희도 당시 나이가 48세, 그를 수행한 참모들도 거의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다. 패기있는 지도층이 이끌던 젊은 한국이었다는 얘기이다.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