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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時代 단상(斷想)

自由人 2018. 6. 20. 06:01

100세 時代 단상(斷想)
캐나다 퀸스대학 철학교수 크리스틴 오버롤의 저서
<평균 수명 120세, 축복인가 재앙인가>를
만난 것은 8년 전이다.
평균수명 120세!
그때는 인간들의 희망사항으로 여겨져 웃고 말았다.
최근 보험회사들이 쏟아내는
‘100세 보장’ 광고를 대하면서 내 생각을 내려놓기로 했다.
오래 사는 것이 재앙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100세 시대의 리스크’를 조목조목 열거하며
위험(risk)을 경고하기에 이른 것이리라.
리스크 목록들 중에서
4대 리스크로 꼽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돈 없이 오래 살 때(無錢長壽)
아프며 오래 살 때(有病長壽)
일 없이 오래 살 때(無業長壽)
혼자되어 오래 살 때(獨居長壽)
우리는 이들 리스크를 보며 오버롤이 예고한 대로 100세를
산다는 것이 무조건 환호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다운 삶의 품위를 상실한 채 은퇴 후 마지막
몇 십 년 세월을 명줄만 유지한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재앙이다.
돈 없이 오래 살 때
가진 것을 지킬 것인가, 일확천금을 꿈꿀 것인가
의식주(衣食住)는 인간생활의 3대요소다.
세 가지 모두 돈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
이처럼 돈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요소지만
돈 앞에서 비굴해서는 안 된다.
더더구나 돈으로 교만을 부려서도 안 된다.
돈은 인간이 함부로 대해도 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돈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잃는 사람도 있다.
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밝고 냉정하고 단호하다.
아홉을 가지면 하나를 채워 열을 만들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때, 무모한 한탕주의에 빠질 때
그들 앞에는 빈손의 후회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눈물뿐이다.
일확천금을 꿈꾼 그들의 말년이 빈손일 수밖에 없는 것은
‘경제정의(經濟正義)’의 불문율 중 하나가 아닐는지.
아프며 오래 살 때
징징대는 여자에게서는 친구가 떠난다
지갑에 돈이 가득하면 행복할까?
인생은 돈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불행한 백만장자가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행복할 만큼 적당하게 돈이 있고
건강하면 노년에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지만 육체적인 건강은 반쪽 건강이다.
마음이 병들고 영혼이 갈잎처럼 바스락거리면
아무리 돈이 많고 육신이 건강해도 행복할 수 없다.
한 달에 한번 만나는 여고동창 모임에
그녀가 나타나면 화기애애하던 친구들이 입을 다문다.
“나는 아픈 몸을 끌고 나왔는데
너희들은 무엇이 그다지도 희희낙락 즐거우냐?”로 시작해
한 달 동안 병원을 전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총무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아프다는 소리만 반복하며 미적거리자
“그렇게 아프면 집에서 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에 울며불며 노발대발.
그녀 때문에 고향친구 모임을 해체했다.
까칠한 여자는 참을 수 있지만
징징대는 여자는 참을 수 없다.
병원에서는 멀쩡하다는데 그녀는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단다.
내가 진단한 그녀의 병은 ‘마님 병’이다.
이 증상은 돈 많은 노년의 여자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
돈의 세력을 믿고 안하무인인 그녀의 마님 근성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는가.
가사도우미도 얼마를 버티지 못하고 떠난다.
자기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을
은폐하려 아픔을 방패로 삼다
아픔에 갇힌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세월 속에 첩첩이 쌓여온 권태감에 짓눌려
전신의 근육들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상상임신처럼 상상통증은 아닐까.
100세라도 백내장, 위암 등 육신의 병은 고칠 수 있다.
치매도 힘들고 뇌졸중도 힘들지만 노년의 병 가운데
가장 고약한 병이
‘마님 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녀를 보며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지성 시몬 보부아르가 이런 병을 앓고 있는
노년 앞에 내놓은 조언이다.
“노인에게 건강보다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일 없이 오래 살
과거를 내려놓아야 일이 보인다
그녀는 대학생인 남매의 공부만 끝나면
부부가 함께 여행도 다니며
노년을 행복하게 살리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폴 퀸네트가 말하기를
‘계획하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라
했는데 그녀의 인생이 그랬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와 초인종을 누른
남편이 대문 앞에서 쓰러졌다.
병명은 심장마비.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컸다.
은행원 아내로 안정된 생활을 해온 그녀는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남편이 남긴 통장은 금방 바닥이 났다.
남편이 마련한 집이기에 집만은 지키리라 다짐하며
슬픔을 털고 일어난 그녀가 찾아간 곳은
남편이 근무하던 은행이었다.
청소부 일도 기꺼이 하겠노라 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일은 새로 발급된 카드를
본인에게 직접 전하는 것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일을 했다.
카드 심부름 값이 오죽이나 알량했으랴.
그 자투리 돈의 자투리를 한 푼 두 푼 저축한 것이
그녀를 건강하고 담대한 어머니로 서게 했다.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끝까지 지킨
그 집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며 오늘도 집을 나선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미국의 정치가
로벨트 라이니크의 말이 떠오른다.
‘노동이 집안으로 들어오면 빈곤은 도망친다.
그러나 노동이 잠들어버리면 빈곤이 창으로 뛰어 들어온다.’
노년의 일은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목공소에서 버린 토막나무로 소품을 빚는 것도
노년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일에 속한다.
천지에 널린 것이 일이지만 찾아 나서지 않으면
일이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다.
일을 찾아 나설 때의 가장 큰 걸림돌이 과거다.
과거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미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전설의 투수 사첼 페이지가
우리에게 남긴 당부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어제가 당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혼자되어 오래 살때

외로워하면 외로움이 친구를 데리고 몰려온다

불행은 혼자 다니지 않고 몰려다닌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외롭다고 뇌까리면

떼를 지어 달려드는 외로움에 포위당하고 만다.

느긋하게 뚜벅뚜벅 말없이 자기 앞의 길을 걷노라면

길가의 아름다운 풀꽃도 만나고

산새들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

남편이 떠나자 실버타운에 입주한 그녀는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람들이 그녀의 별명을 지었는데 황당하게도 ‘그때’다.

그녀는 말끝마다

“그때는 겨울마다 따뜻한 지방으로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는 가을이면 주말마다 등산을 다녔는데…”로 시작한다.

그녀에게는 과거만 있고 현재는 없다.

햇빛 찬란한 오후 3시,

산책에 나설 동행을 찾지만 모두 피한다.

그녀의 ‘그때’ 타령에 질렸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영화관이나 미술관을 가는데

그럴 때면 혼자 집을 나선다.

감상을 위한 나들이는 편안한 자세로 부담 없이

몰입할 수 있어야 하니 혼자가 좋다.

그날도 혼자서 <세이프 헤이븐 Safe Haven>을 보고

상영관을 나서는데

내 연배로 보이는 그녀가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군요. 나도 혼자 왔어요.

한 달에 대여섯 번 혼자 이곳에 와요.

며느리가 ‘멋지다’고 추켜세우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오는 거죠.

오늘 영화 참 감명 깊었어요.

시한부 젊은 여자가 죽음을 준비하며 누구일지,

언제일지도 모를 아이들의 새엄마가 될

여인에게 남긴 편지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워 가슴이 뭉클했어요.”

이 정도의 감상 수준이라면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닐 만하다.

혼자 문화생활을 즐기면 몰려다닐 때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산책도 혼자, 음악회도 혼자, 식당에도 혼자….

혼자에 익숙해지면 외로울 시간이 없다.

몸은 마음의 언어라고 했다.

마음이 기뻐 뛰면 몸도 기뻐 뛴다.

세월이 흐르고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야 먹겠지만

혼자를 즐길 줄 아는 노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가 되는 게 인생이다.


      

떠날때는 말없이(경음악 전자올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