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인터넷 검색순위 상위권을 오르내리던 주제는 ‘신도시 오줌 사건’이었습니다. 사연인즉 배곧 신도시의 한 노래방에서 아이가 룸에서 소변본 것을 나무란다는 이유로, 업주를 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한 30대가 검찰에 넘겨졌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인터넷 한 커뮤니티에 “신도시 오줌 사건 제가 겪었습니다”라는 업주 아내의 글이 올라와서 차츰 수면 위로 올라와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사건의 성격은 다르지만 ‘태권도 맘충’ 사건도 검색순위를 오르내렸었습니다. 경기도 광주 한 맘 카페 회원 A씨가 태권도 학원 차량이 난폭 운전했다는 허위 글을 올렸다가 ‘태권도 맘충’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은 사건입니다. A씨처럼 개인적인 잘못을 저지른 여성을 ‘맘충’(엄마+벌레충蟲의 합성어)이라고 부릅니다.
‘맘충’이란 말은 2012년 무렵부터 식당, 카페 등 공공장소에서 자녀의 소란을 제지하지 않는 등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지 않는 엄마를 가리키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는 ‘노 키즈존’(no kids zone)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업소에서 어린이가 안전사고를 당하면 고스란히 업소가 배상을 해주어야 하니 차라리 어린이를 동반한 손님을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른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어른의 의식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자라나는 환경 역할을 합니다.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능대로 살아가느냐, 이성에 따라서 살아가느냐일 것입니다.
어미가 버린 사자를 울타리 안에서 기른다고 해도 사자의 본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과일이나 풀을 먹지 않고 고기를 먹어야 하며, 어미가 가르쳐 주지 않는데도 저 혼자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람은 이성이 움직여 주는 대로 살아가는 까닭에 어미인 부모가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자식들의 삶의 색깔이 정해집니다. 부모가 세상을 보는 눈이 정직하면, 자식의 눈도 정직해집니다. 부모가 치맛바람으로 자식의 성적을 올려주면, 자식은 노력보다는 요령과 눈치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60년대 초만 해도 일을 하고 싶어도 쉽게 취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농촌은 도시보다 사정이 더 안 좋아서 품삯 대신 담배 한 갑에 밥 세 끼를 배불리 얻어먹을 수 있는 일도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품삯을 받는 일은 집에서 아침을 먹고 일을 하러 갑니다. 10시쯤 오전 새참으로 국수를 먹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오후 새참을 먹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흙 묻은 손이며 얼굴을 씻고 저녁을 먹은 후에야 집에 갑니다.
‘꽂이모’는 새참이며 점심이나 저녁을 먹지 않습니다. 혼자 한 마지기의 논에 모를 심어야 하는 까닭에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점심을 챙겨 들고 논으로 나갑니다. 혼자 모를 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를 찌는 일부터 시작해서, 못줄을 놓는 것, 못단을 던지는 일까지 혼자 하려면 쉴 참도 없이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모를 심어야 컴컴한 밤에 끝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손가락에 쥐가 나고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도 집 안에서는 당당하게 어깨를 반듯하게 펴십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당당한 어깨를 바라보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성장을 합니다.
찔레나무 새순처럼 여린 초등학교 6학년에게 ‘학교를 졸업하면 네 밥벌이는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선생님이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졸업식 날 부모가 짜장면을 사주면서 "너는 학교를 졸업했으니 내일부터 일해야 한다"고 비장한 얼굴로 통보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당당한 어깨를 보고 스스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손톱이 아직 말랑말랑할 14살 어린 나이에 자기 키에 맞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거나, 도시 공장에 견습공이나, 상회의 점원,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겨주는 꼬마 등으로 취직이 되어 떠납니다. 소녀들은 옷 몇 가지를 싼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부산의 고무공장이나, 청계천의 봉제공장에 취직하러 올라갑니다.
명절이면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며, 집안에서 필요한 전기밥솥이며 보온물통, 전기다리미 같은 것을 사 들고 고향에 갑니다. 이제 열 몇 살의 어린 자식이 들고 온 전기밥솥을 어루만지며 기뻐하는 어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고생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그 밥솥을 사기 위해 동료들끼리 계를 결성하고, 곗돈을 붓기 위해 12시간 이상 일을 하고 퇴근길에 호떡 가게 앞에서 갈등을 겪었던 것도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부모님이 “너는 자식 된 도리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돈을 모아서 이번 명절에 내려 올 때 전기밥솥을 사 오너라.”하고 주문을 했더라면, 화장품 한 개 사는 돈이 아까워서 여러 명이 돈을 모아 사지는 않았을 겁니다. 밤을 꼬박 새워 일하는 날 지급되는 야식비를 아끼려고 빵 한 개와 맹물로 배를 채우고 졸린 눈을 비비며 직기(織機) 앞에서 끊어진 실을 잇지도 않았을 겁니다.
온실에서 피어난 꽃은 들판에서 비바람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진흙탕 길에 자식을 등에 업어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신발과 옷을 덜 버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대한항공 사건을 비롯해서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자식들의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천성(天性)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알게 모르게 학습한 결과일 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와 우산을 같이 쓰고 가면서도 비를 덜 맞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자동차에 혼자 태우고 빗속을 달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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