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과 희망의 차이 (해)(꽃)
근심과 희망의 차이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심은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고,
희망은 미래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대한 기대이다.“
과거 근심에 휩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
바들바들 떨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근심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근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고,
내 힘으로 좌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근심으로 낭비할 시간에 사력을 다해
희망을 갖고 뛰는 것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서 지금도 최선을 다하자고 자기 설득을 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결정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관점을 근심으로 둘 것인지, 희망으로 둘 것인지...
너와 나의 인연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또한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녀의 인연이란
그래서 눈부시게 두렵고
아름다운 기적이다.
- 최인호의《인연》중에서 -
*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처럼
많은 인연들, 그 중에 너와의 만남은 참 행복입니다.
늘 웃음짓게 만들고 마음을 한가득 채워 주지요.
그 인연 소중히 간직합니다.
배려와 믿음으로...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연중 제24주일
말씀의 초대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를 보고 진노를 터뜨리시려 하자, 애원하여 재앙을 거두시게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하던 자였으나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제2독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한다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리자,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양과 은전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를 드시며,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2,7-11.13-14
그 무렵 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그러자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13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1,12-17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12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13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6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2<또는 15,1-10>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1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직장 상사 때문에 회사 다니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형제님이 계십니다. 이 상사의 성격이 얼마나 왔다 갔다 하는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빨리 하라고 다그치다가도 “그렇게 서두르면 실수할 수 있잖아. 왜 이렇게 서둘러!”라는 말을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합니다. 어떤 때에는 무조건 “허허~~”하며 받아주다가도, 또 어떤 때에는 자그마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아서 혼을 냅니다.
이러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어떻게 하면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과감하게 사표를 내고 직장을 그만두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요즘처럼 취직이 쉽지 않은 시기에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맞습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요. 직장 상사를 받아주는 것 역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직장생활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파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때 한가한 병원을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병원을 나오면 그만이죠.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등등의 말로 따질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꼭 이 병원의 의사에게 진료를 봐야 한다면 그냥 꾹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사랑의 길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라는 묵상을 해 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이 길이 쉽지는 않습니다. 나의 것들을 어느 정도 채운 다음에는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 그리고 무조건 사랑하고만 하시니 그 말이 좋은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주님을 떠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니 절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냥 주님께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 맞추는 삶이 무조건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의 욕심과 이기심이 힘들게 하는 것이지, 주님께 맞추는 사랑의 실천이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로 ‘내가 4를 주고 6을 받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6을 받지 못하니 불평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이 힘들게 하는 것이지, 사랑의 실천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잃었던 양과 은전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작은 하나도 소홀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를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사랑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둘을 주고 하나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아홉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다(브라운).”
이런 사랑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생은 요리와 같습니다. 좋아하는 게 뭔지 알려면 일단 모두 맛부터 봐야 하죠(파울로 코엘료).
“괜찮다”는 말
세계적인 명문대라고 할 수 있는 하버대학교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들은 말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여러 말이 있었지만 학생들이 가장 들었다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다 괜찮을 거야.”
소위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부모에게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말을 계속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큰 잘못에도 침묵하고 계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따라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자존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갑니다. 반대로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괜찮다’라는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자그마한 실패에도 자존감을 잃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괜찮다.’라는 말. 이제는 내 주변에 많이 말해 주는 것이 어떨까요? 나의 입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내 이웃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연중 제24주일: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세 개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탕자의 비유’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하겠다.
복음: 루가 15,1-32: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 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절) 하신다.
즉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절)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義)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을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절)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사제 : 조욱현 토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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