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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차이점

自由人 2016. 9. 21. 21:02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차이점ㅡㅡ 정관큰스님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차이점

 

생명生命의 태초太初는 식이 아니다. 무의식無意識이다.

냉난자지冷暖自知의 근원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이 법신法身이고, 태초太初이고,

진리眞理이고, 진아眞我이고, 불성佛性이고,

진불眞佛이고, 여여如如이고, 여래如來이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근원이고,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영지靈知이다.

이 아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무의식이다 해서 고정된 불변不變은 아니다.

 

휘발유가 위력을 발하는 화기火氣이지만

성냥의 연이 닿아야 화력의 기운이 나타나듯이

이 닿기 전은 그저 잠잠한 부동不動이지만

무의식의 영지근원靈知根源에도 연이 닿으므로

꿈틀꿈틀하는 생을 감지한다.

 

거듭 말한다면, 무의식이 곧 공이다.

이지만 식을 발하는 공이지, 이다 해서

을 발할 수 없는 허무적인 것은 아니다.

을 발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초능력이

의 위신력이다.

을 발할 수 있는 자유자재한 초능력이기 때문에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을 발할 수 있는 초능력이 없다면

진공묘유라 할 수 없지 않는가!

 

앞 서두에는 연이 닿아 식을 발한다 했다.

이 닿아 식이 발하기도 하지만,

이 닿기 전 무의식의 공에서도

자유자재로 식을 발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무의식의 공에서도

본인이 앉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앉아지고,

눕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누워지고,

서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서지고 하니

꼭 연이 닿아야만

이 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닿기 전 공으로도 식

자유자재로 발할 수 있다.

이 바로 본래지本來知 대자연이다.

이 또 관자재보살이다.

 

냉난자지冷暖自知가 본래지이다.

냉난자지는 본래부터인 대자연이지

작위作爲가 아니다. 인위人爲가 아니다.

는 본래부터이지만 식은 본래부터가 아니다.

는 대자연이지만 식은 대자연이 아니고

어느 때부터 작위이다.

차다 따뜻하다는 식을 발하기 전

은 항상 그대로 불변이지만

으로 차다 따뜻하다하는 식이 나타난 그 식

그때부터 흔적이 되고, 이 되고,

이 되고, 앞으로의 역사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은 작위作爲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공으로 되돌아가야만

안심입명安心立命, 영원한 평화이다.

반복된 설명이지만 무의식의 공은 대자연이다.

무의식의 공은 연기법緣起法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사계절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흩어진다.

한 시가 두 시 되고, 두 시가 세 시 되며,

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이 계절이다.

다 연기법이 아닌가.

 

무의식의 공은 연기법이 아니고, 무연기無緣起이지만,

봄이면 봄인 줄 알고, 가을이면 가을인 줄 알고,

겨울이면 겨울인 줄 스스로 아는 법

무의식의 묘리妙理이다.

배워서 아는 것 아니고,

스스로 아는 본래지本來知 대자연이다.

무의식이 본래지이고, 본래지는 허공 대자연과 같다.

허공으로부터 연기緣起된 가지가지 천억 만억의 구름들은

다 생멸하지만,

허공은 수억 년이 지나가도 지나간 흔적 없이

항상 그대로 텅 비어 있듯이

무의식 본래지 경지도 허공과 같이

항상 텅 비어 있는 평화이다.

 

에서 생사生死가 없고 노사老死가 없다는 것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생긴 색신色身을 말하는 것 아니고

연기緣起 이전 무의식 공을 말하는 것이다.

이 우리들의 본분이지

색신은 잠깐 동안 만난 연기緣起일 뿐이다.

우리 불교는 무의식 공의 실체를

꼭 증득해야 함을 구경究竟으로 삼는다.

배워 알아서 되는 것 아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지식이지 구경究竟은 될 수 없다.

 

무의식 공의 실체를 증득함으로써

우리들의 본분인 무의식 공

생로병사가 없다는 신이 확실하게 선다.

본인이 직접 증득하지 못하면

부동不動의 신, 지혜가 없다.

이 확고함으로써 생사에 공포가 없어진다.

이 아니고는 공포를 없앨 수 없다.

을 증득하지 못하면 그저 믿으려는 정진精進이지

확고하게 믿어지는 신자信者는 못된다.

공포가 없는 신자가 꼭 되어야 한다.

의 부동자不動者는 공포가 없으니

지혜로운 신이 서지 못하면 공포 속에 살게 된다.

우리들의 노력으로 공포를 벗어날 수도 있고

노력이 부족하면 공포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이다.

 

중복된 설명이지만 무의식의 공은 식이 아니기 때문에

첩첩 비밀의 베일을 거둘 수 없고,

걷어낼 수 없으니 그 신비가 다함이 없다.

앞에 말한 신비는

라는 존재가 태어남으로써 있는 것 아니고,

라는 존재, 우리들의 존재가

태어나기 전 본래부터 있음이니

하늘땅 이전 본래부터 있음이니, 도대체 무엇인지…….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다 모른다 했다.

만약 안다 했다면 큰 망발妄發이다.

 

우리들의 색신色身이 다 없어진다 해도

무의식의 법은 항상 그대로이지

어떤 퇴색退色과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만 리 밖에서 바람이 불어도

산은 항상 움직이지 않고

천 년 동안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와도

바다는 무겁지 않다는 말과 같이

무의식 진리는 영원히, 영원히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우리들 색신色身 속의 무의식 공

진리이고, 하늘이고, 이고, 불성佛性이다.

 

무의식은 자기 행위와 관계없이

본래부터 대자연이고

잠재의식은 자기 행위 결과들의 성분이

자기 내면성에 깔려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들마다 직업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

직업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그 성분과 습관들이 본인들 체내,

본인들 내면세계에 흡인吸引되어 있음이 잠재의식이다.

 

기사이면 기사 직업, 농업이면 농업 직업,

상업이면 상업 직업, 기술자이면 기술자 직업,

공업이면 공업 직업, 학자이면 학자 직업,

정치가이면 정치가 직업, 예술가이면 예술가 직업,

목수이면 목수 직업, 가지가지 수많은 직업성분들이

밖으로 겉으로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 직업의 습이 자신의 체내에 스며들어

누적되어 있다는 것.

 

한 예를 든다면,

붓글씨를 한 달 연습한 사람보다

열 달 연습한 사람이 붓글씨를 훨씬 더 잘 쓰는 이유는

한 달 쓴 사람보다 열 달 더 연습한 습

자기 체내 내면성에 짙게 스며들어 있기에

다른 사람보다 붓글씨에는 더 자신을 가진다는 것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 아닌가.

 

술 중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술을 쉽게 끊지 못함은

술을 많이 마셔 술 독이 체내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체내에 잠재해 있는 술의 독이 술을 더 흡인하게 해서

자신의 의지가 약해져 고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의식無意識이 하나라고 한다면

잠재의식潛在意識은 자기 직업에 따라 다 다르니

잠재의식의 종류는 수수만 개이다.

수수만 개의 잠재의식 등등을

불교에서는 총괄적으로 업이라 한다.

 

업에는 악업惡業과 선업善業이 있어

악업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선업에는 낙이 따른다.

무의식은 본래 대자연의 법이니

항상 우리들 머리 위에 있지만

잠재의식의 업은 어느 때부터라는 작위作爲이기 때문에

본인의 수행능력으로 지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부처님의 법이다.

 

앞의 글씨가 잘못되면 뒤에 지우개가 지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악업도 강한 수행의 의지로 지울 수 있다.

수행능력이 바로 잘못된 글씨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와 같다 하겠다.

악업惡業은 지워야 한다.

나쁜 습관이 바로 자기의 재앙이고, 자기의 박복薄福이다.

업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책임이지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무의식의 공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밉고 고운 차별도 없다.

지옥도 아니고 극락도 아니다.

중생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 없는데서 식을 일으키면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된다. 중생도 되고 부처도 된다.

우리 모두 모두는 무의식의 공을 회복해야 한다.

 

불교의 구경락究竟樂은 공포가 없는 평안이다.

공포가 없는 건강이다.

공포가 없는 영영永永 평화이다.

이전에서야 무엇이 있겠는가!

 

이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은 식을 발하는 전지전능이다.

이 천백억화신의 주인이다.

의 구경정법究竟正法은 공, , 일세.

 

잠재의식은 공에서부터 출발이다.

은 연기법緣起法이다.

무의식無意識은 연기법이 아니다.

무의식이 청정법신淸靜法身이다.

청정법신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다.

 

金井山人 佛國正觀 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