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풍경

스리랑카 시기리야 성채터 바위산으로의 여행

自由人 2017. 2. 23. 06:52
스리랑카 시기리야
성채터 바위산으로의 여행

 



스리랑카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도시,하늘에 떠있는 성, 시기리야였다.

광활한 밀림 평원 속에 갑자기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지은 궁전. 사진으로 보니 실로 멋졌다.

말이 필요없어 보였다. 그래서 사진 자료들을 뒤졌다. 


 


 
멋졌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 절벽 위에 건물터가 있는 것을 보니 저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저런 곳에?  
시기리야란 저 곳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답메일을 보냈다. 

 "갑시다, 스리랑카." 
 "잠깐 창밖을 보십시오.

저기가 시기리얍니다." 

울울창창한 열대의 숲 위로 바위산이 솟아올라있었다.


 


 
우리나라 마이산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굵고 높게 우뚝 솟았으되, 그 위는 평평했다.

과연 묘한 산이었다.
'저 산이 성채란 말이지.'

이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니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얼마 더 지나 버스는 시기리야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바위 성채까지는 고대 왕조가 꾸민 정원이 펼쳐져있었다. 


 



물과 테라스의 정원을 지나 산을 향해 가는 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제 건물은 사라지고 터와 흔적만 남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1500년 넘는 오래된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성채로 가는 정원길은 성채 못잖게 그윽한 분위기가 좋았다.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다.

자료 사진 한 컷. 



 
그리고, 시기리야의 바위는 코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묘한 성채는 5세기께,

싱할라왕조의 카샤파 1세란 왕이 지었다.
시기리야란 이름은 `사자 바위'란 뜻.

사자의 모습을 한 저 높은 절벽 위에 왕은 굳이 궁전을 올려세웠다.

해발 37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사방이 낭떠러지이고,

주변에 아무런 높은 봉우리가 없어 그야말로 전망대같은 궁전이 탄생했다.
 
바라 보면서도 궁금했다.

저렇게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는 궁전이라니.

궁금함과 진입부의 아름다운 정원의 흥취가 묘하게 섞이면서 성을 향해 걸어갔고,

사자의 성은 점점 더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다. 


 



제법 긴 평지 정원을 지나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기리야의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석 암반에 다듬은 돌,

그리고 벽돌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세월의 풍경이 매력적이었다.

습한 기후 때문에 벽돌에는 연두색 이끼들이 가득했다.

돌과 이끼가 어울리는 모습,

벽돌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곧바로 벽처럼 오르막 길이 시작됐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난 계단길 위로 시기리야가 있다.
 
# 계단, 또 계단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지는 광경들
 
계단이 계속 이어지지만 생각보다 전혀 힘들지는 않았다.

기대감이 컸고,

주변으로 보이는 모습들이 멋졌던 탓이었다.
빽빽한 나무 숲 사이로 떨어지는 빛,

그리고 정성껏 쌓은 건축의 흔적들... 


 



길은 계속 지그재그로 커브를 틀며 위로, 위로 향한다.

갑자기 도중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 문. 


 



사람 궁둥짝을 닮은 저 쌍바위 사이를 지나니

본격적인 시기리야의 입구가 시작된다.

자연 지형에 맞게 낸 길이었겠지만,

궁금증을 계속 유발시키도록 연출한 듯 시기리야로 가는 길은 흥미로웠다. 


 


 
이끼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시기리야의 거대한 사자봉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실제로 보니 실감이 났다.

자연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이 눈을 압도해왔다.
 

앞서 가던 이들은 아슬아슬한 철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보인다. 

그 난간 다음에는 갈색 벽이 이어진다. 

저 벽을 지나면 다시 그 위로 보이는 수직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아직 저 아슬아슬한 계단을 오르지도 않았건만 벌써 아찔할 정도다.
 



자, 드디어 바위 절벽이다.

직접 마주보니 더욱 아찔했다. 

이런데다 길을 내서 꼭대기에 궁전을 짓다니,

이거 제대로 미친거 아냐? 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이제 나도 나선형 계단을 오를 차례.

저 계단 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바로 이 시기리야 최고의 보물이 있다.

그 보물이란,

고대의 그림이다.

바위산 암벽에 고대인이 그린 프레스코화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미인도인데,

1500년 전의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바위벽 중간에 움푹 패인 공간이 나오고,

그 안에 그림 속 여인 22명이 남아있다.

한때 그림은 500여명에 이르렀지만 지워지고, 이들만이 남았다고 한다.

1500년전 그림인데 얼마 전에 그린 듯 생생한 것,

이게 시기리야 프레스코화의 미스터리다. 


 



이 그림이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단계가 무척 복잡하고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바위벽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판을 만든다. 

바위 표면에 섬유질을 섞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른다.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매끈하게 덮는다.

이런 3단계를 거쳐야 그림판이 완성된다.
 

그 다음에는 물감을 만들 차례.

각종 식물과 꽃, 잎, 나무 즙을 섞어 안료를 만든다.

이런 정성 덕분에 저 그림은 1500년 세월을 살아남아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추앙받고 있다.
 
벽에 매달려 그림을 보았으면,

다시 정상으로 갈 차례.

뱅글뱅글 나선형 계단을 다시 내려와 절벽 난간길로 나아간다.
 



절벽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평원의 모습은 장관이다.

이 평원 가운데 솟아오른 이 붉은 편마암 산이 더욱 신기한 이유다. 


 


 
걸어온 입구 정원이 어느새 까마득하게 아래에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모습을 잠시 감상한 뒤, 위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지금은 잠시 철제 난간 대신 제대로 만든 길이어서 조금 나은 편. 


그러나 이것도 옛날 사람들에 견주면 호강하며 오르는 길이다.

원래 이 바위산 계단은 모두 대나무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 지금의 철제 계단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저 옆구리 길을 따라 졸졸졸 올라가면, 드디어 정상?
아니다. 꼭 절반을 지나왔다.

이제 중간 지점이 눈 앞에 나타난다.
 
# 사자의 발톱을 지나 머리 위로
 
옆구리 길 마지막에는 갑자기 너른 선반같은 평지가 있다.

시기리야 사자산의 정식 입구 지점이다.
거대한 바위산은 앞쪽에 너른 로비처럼 입구를 __들 공간이 있었다.

사자 모양의 바위에 사자 조각을 새겼다.
그래서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내 카메라론 광각의 한계가 있어 자료 사진으로. 


 



붉은 바위 덩어리 아래로 거대한 사자 발톱이 보인다.

저 위로 올라가면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꼭대기 궁전터다.

그리고 계단의 각도는 더욱 아슬아슬하게만 보인다.

여기서부터 다시 저 위로 올라가면 진짜 정상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쏟아지는 땀을 잠시 식히며 앞으로 올라갈 계단을 바라본다.

사람이란 참 지독한 존재들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올라가는 우리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 계단을 만든 이들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을까.

그런 죽음을 강요한 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1500년 뒤, 그 죽음을 딛고 올라가는 우리는 뭔가...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위를 올려다본다. 아찔하다. 


 



눈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전망도 더 시원해진다.

덥디 더운 스리랑카의 풍경.

이 더운 곳에서 이 높은 성을 짓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다시 한번 실감한다.

올라가는 길을 위에서 찍은 항공사진 한 컷.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오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빨리 정상에 다다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자, 정말 정상이다.

 갑자기 넓은 평지다.

궁궐은 사라졌고,

 터는 의구하다.

한때 500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던 왕가의 자리다.

건물이 사라져서 더욱 세월을 느끼게 만드는 곳. 


 


시원한 산들바람에 몸을 식히며,

시야 전체로 펼쳐지는 푸른 숲의 바다를 본다.

신선이 따로 없다. 


 


 

정상에 오른 방문객들은 모두 감탄하며

저마다 편한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응시한다.

몇 시간이고, 하루 종일이고 앉아있고만 싶어진다.

왕실만 감상하던 풍경은 이제 모두의 것이다. 


 

# 왕은 미쳤던 것일까?

이런 곳에 성을 짓다니 


 

시기리야를 보면 누구나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이스라엘의 저 유명한 유적지, 마사다 요새다. 


 


주변이 숲이 아니라 건조한 황야란 점만 빼면 마사다와 시기리야는 꼭 닮았다.

평원 위로 홀로 솟은 천혜의 요새, 난공불락의 공중 도시란 점이다. 


 


그러나 저 마사다와 이 시기리야는 다르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유가. 


 

마사다는 전쟁이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택한 곳이었다. 

서기 70년 경, 유대인들은 점점 세력을 넓히는 로마에 결사항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해발 430여미터인 저 절벽 위 요새로 올라가 로마제국의 대군에 저항했다.

 특별한 지형 덕분에 세계 최강 로마군도 저 요새는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물과 곡식을 잔뜩 마련한 저항군들은 무려 2년 넘게

저 곳에서 로마군에 포위된 채 버텼다. 


 

 

그러나 로마는 집요했다.

아예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직접 만들어 공격에 나섰다. 

그토록 치열하게 버텼건만 마사다의 요새는 결국 함락 된다.

그리고 함락 직전,

성채 안에 있던 900여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샤파 왕이 시기리야를 지었던 것은 침략군에 맞서는

특별한 요새로서의 마사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황당할 정도로 확실한 요새 속으로 그가 나라를 이끌고 들어갔던 것은

그 개인의 욕망과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광기와도 같은.
 
전설같은 역사에 따르면 카샤파 왕은 다투세나 왕의 장남으로,

그 밑에 배다른 동생인 목갈라나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 카사퍄는 어머니가 평민이었고,

목갈리나는 어머니가 왕족이었다.

출신 성분이 동생에 뒤지기 때문에 카샤파는

왕위를 동생이 물려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고 만다.

권력을 위해서는 늘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법.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깜짝 놀란 동생 목갈리나는 바다 건너 인도로 도망친다.

이제 확실한 왕이 되었건만, 그럼에도 카샤파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동생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새로운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그래서 그는 저 시기리야의 사자산 위로 올라갔다.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어 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자산은 원래 수도승들이 도를 닦던 곳.

그 천혜의 요새는 그래서 갑자기 왕가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걱정했던대로 망명했던 동생은 10여년 뒤

마침내 세력을 규합해 형에게 복수를 하러 쳐들어온다.

요새에 있기만해도 버틸 수 있었겠지만

카샤파는 분노에 불타 직접 동생을 물리치러 전장에 나선다.

그리고 전세가 위기에 빠져 홀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동생의 군대를 앞에 두고

왕은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카샤파가 죽고 난 뒤 시기리야 요새는 다시 왕실에서 수도승의 수도처로 되돌아갔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운명의 요새였다.

그 역사는 겨우 20년을 채우지 못했을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점점 잊혀진 곳이 되어버렸다.

오랜 세월 밀림 속에서 방치되었던 사자의 요새는

훗날 영국인들에게 발견되며 비로소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 시기리야에서 떠올리게 되는 그 나라, 고구려
 
시기리야는 천륜을 거스르고 왕위에 오른 왕의 집착과 광기의 소산이다.

영원불멸의 요새, 절대 함락되지 않는 건축을 꿈꿨지만

그 어떤 건축보다도 빨리 수명을 다한 건축이었다.

건축에서 영원이란 없다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듯한 그런 곳이다.
 
그런 점에서 시기리야는 마사다보다 바로

이 곳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저 깎아지른 산봉우리는 중국 랴오닝성에 있는 `오녀산성'이란 곳이다.

자연적인 요새여서 천혜의 요새가 된 곳이란 점, 

그리고 마사다처럼 저항군의 성채가 아니라

한 나라의 정식 성이 된 곳이란 점에서 시기리야와 거의 흡사하다.

820미터 높이에 절벽 지형만 200미터에 이르는

그야말로 요새로 만들라고 생긴듯한 곳이다.
 
그리고 저 오녀산성은 중국 땅에 있지만 뜻밖에도 우리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으로 추정된다.  

졸본성이 저 곳이었으리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유적이자 명승지다.
 
왕은, 그리고 왕국은 때론 과한 욕심에 빠지곤 한다.

절대 침공하지 못할 왕성을 만들면 왕국이 유지될 것이란.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결코 그런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되풀이해 보여줘 왔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은 하겠지만, 그 스스로 나아갈 길을 잃는다.

유지는 하되, 성장은 할 수 없게 된다. 


고구려는 저 오녀산성에서 개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은 이 곳에 성을 쌓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니 저 성은 고구려 개국도성이었을 것이다. 

주몽은, 그리고 그의 새 나라 고구려 사람들은 

왕국을 열며 영원한 제국을 꿈꿨을 것이다.

그래서 절대 적들이 정복못할 저 천연의 요새를 골랐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소통하고 열려야 오히려 더 번영하는 법.

결국 고구려는 저 안에만 있어서는 세상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지 못함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고구려는 오래 지나지 않아 새로운 도읍으로 옮기고,

그 뒤에서야 비로소 동북아의 대제국으로 번영의 길을 걷는다.

평지로 나오면 위험에도 노출되지만,

동시에 더 넓게 뻗어나갈 기회를 얻는다. 

만약 고구려가 저 산꼭대기 위에서 자기네들끼리만 오래오래 살겠다고 버텼으면 훗날의 그 큰나라가 되었을까.
 
그런 점에서 시기리야와 오녀산성은 역사의 흥망 법칙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자연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변함없는 진리를 보여주는 곳들이기도 하다. 
 

사진 한 장에 반해 간 저 열대의 남쪽나라 시기리야는 문득 고구려를, 

역사를, 종교와 전쟁과 자연을 새삼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평소 쉽게 생각할 일 없는 이런 근본적이고 거대한 개념을 마주치는 것, 

그게 여행의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컸다. 

시기리야에 간 탓에 아직 가보지 못한 마사다와,

오녀산성을 더욱 갈망하게 됐다.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