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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고단수 외교

自由人 2017. 8. 11. 06:57


               

 

이승만의 고단수 외교

 아이젠하워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이승만을 두려워했다         
 

 

이승만의 고단수 외교 “아이젠하워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이승만을 두려워했다”

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1)- 이승만 편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경무대에서 열린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한미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석방 등 벼랑끝 외교를 펼쳐 얻어낸 결과물이다.

  고 허문도(許文道) 전 통일원장관이 1995년 1월 《월간조선》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김일성의 핵무기 협박 외교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를 연구한 데서 나왔다.〉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외교가 다분히 이승만 전 대통령의 방식을 닮은 것은 분명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더불어 신(神)이 대한민국에 내린
양대(兩大) 은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자로 폄하되고 있지만 역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약소국의 지도자였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 지도자들이 눈치를 볼 만큼 ‘외교 달인(達人)’이 된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는 초일류 학력을 지녔다.
조지 워싱턴대(학사) 하버드대(석사) 프린스턴대(박사)를 나온 이력과 거기서 얻은 인맥은 요즘에도 흔치 않다.
 
  둘째, 그는 미국 대통령·국무부와 의회를 상대하며 숱한 좌절을 거쳤다.
이 실패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 정계의 맹점을 찾아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셋째, 그는 풍부한 학식과 사고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식견(識見)을 키우며
미국 지성계에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1941년 이승만 대통령이 플레밍 H 리베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당대의 명저(名著)다.
1940년 한 해 동안 이승만은 책의 원고를 집중적으로 집필했다.
그 원고를 받아 타자를 쳐 주느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손이 짓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내막기(內幕記)》의 서문은 이렇다.
〈내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동기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미국으로 하여금 대일(對日)전쟁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야욕을 통찰하고 견제해 일본과의 전쟁을 미리 막으라는 게 책을 낸 목적이었다.
 
  책이 나왔을 때 미국인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전쟁도발을 부추기는 망발”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유일하게 펄벅 여사만이 《아시아 매거진》이라는 잡지에서 이승만의 책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로서는 이것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진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렵다.〉
 
  책이 나온 해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미국 정부와 군부에서 이승만의 책은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을 이해하는 교과서가 돼 버렸다.
심지어 ‘예언자’라는 호칭도 따라다녔다.
 
 
  1. 명분을 확보하라 - 국군 단독 38선 돌파 명령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다섯 가지다.
첫째,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국군(國軍)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北進)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유엔군이 북진을 망설이자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버린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89년 펴낸 회고록 《군(軍)과 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엔군에 작전지휘권을 이양할 때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언제라도 작전지휘권을 되찾아올 것입니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소련과 중국의 개입 위협이 없는 경우에 한해 지상작전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한다”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이양한 ‘7·12 대전협정’을 위반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하자
유엔군은 경악했지만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내린 국군 단독의 38선 돌파 명령은
외교적으로 ‘명분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2. 남다른 혜안 - ‘이승만 라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8일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것이 지금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그어 놓은 평화선은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 범위로
국제해양법협약에 새로 도입된 개념인 배타적경제수역(EEZ)의 외측(外側) 한계보다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독도를 라인 안쪽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평화선을 국내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53년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하고 이 수역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해 왔다.
 
  한반도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53해리)에 달하는 이 평화선을 선포한 이유는,
첫째 한·일간의 어업상의 격차로 인한 어민들의 피해를 막아 주는 것이며,
둘째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셋째 세계 각국의 영해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를 인식한 것이고,
넷째 일본 주변에 선포된 해역선인 ‘맥아더 라인’이 철폐된 데 따른 보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이승만 라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양측에 공동규제수역(평균 50해리)을 설정하고 자율적인 조업규제를 실시하는 것으로
이승만 라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비록 10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일본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고
후배 정치인들의 안목이 이승만 전 대통령보다 얼마나 낮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3. 일본을 다루는 법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일본의 진주만 기습 전에 일본의 침략위협을 경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1949년 1월 8일 이 전 대통령은 느닷없이 대마도(對馬島) 반환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대마도 반환 요구로 희석시킨 것이다.
 
  같은 해 5월 20일에는 대일(對日) 배상요구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에 대해 항상 강공을 편 것 같지만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8일
대일 강화조약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임시 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언급을 여러 번 했다.
일본을 긴장시키면서도 일본과의 급작스러운 관계 단절이 생필품 부족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양동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지만
외교 정상화 논의를 하진 않았다.
지금 그는 ‘고집스러운 반일주의자’로 비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의 역량이 어느 정도 일본과 경쟁이 가능한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가능한 한 일본과 거리를 둔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고집한 ‘일본관(觀)’이었던 것이다.
 
 
  4. 극단적 상황을 조성하라 -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 등을 통해 미국은 물론 소련도 경악하게 만들었다.
  6·25전쟁이 길어지자 참전 당사국들은 슬슬 발을 뺄 궁리를 했다.
6·25 발발 1년 만인 1951년 6월 24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가 정전(停戰)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그때 이 대통령은 몸을 부르르 떨 만큼 분노했다.
 
  이 대통령의 격노에도 불구하고 유엔 참전 16개국은 말리크의 제의를 공동 수락했다.
그해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 본회담이 시작됐다.
1952년 10월 8일 옥신각신하던 휴전회담이 포로 교환 문제로 무기한 휴회(休會)됐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과 중공 측은
부상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다시 포로 교환 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편지’를 보냈다.
 
  중공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할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과 야포, 함포 지원만 해 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썼다.
 
  이런 ‘협박’은 가진 것이 없는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이 즐겨 써 왔던 수법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은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부관이 대신 전화를 받아 사령관이 취침 중이어서 바꿔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당장 우리를 돕는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한국에 있는 미국인 2000명을 처형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이 말이 먹혀 미군이 한반도에 즉시 파견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자 세계가 다 놀랐다.
아이젠하워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6월 17일 자로 나에게 보낸 이 대통령 서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폭탄이 터졌다.
2만5000명의 비공산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했으며 이 사건에 한국정부가 관계했음을 인정했다.
이들 2만5000명의 포로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 포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급로나 후방 지역 안전에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존재는 우리가 몇 달 동안 북한과 중공에 대해 주장해 온 입장의 바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한국전에서 싸웠던 클라크 장군 역시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6월 18일 오전 6시 나는 우리가 지금껏 두려워하고 있는 사실이 정말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에 후딱 잠에서 깼다.
이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고 결과를 우려하는 사람들까지도 이 석방의 과감성에 대해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징조는 이 석방조치로 이 대통령의 국민적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은 이제 이승만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가 됐다.
1953년 7월 19일 자 《소비에트 뉴스》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이승만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이승만은 부산 한 모퉁이의 미군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이승만은 너무도 강대, 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국 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5. 대한민국을 살린 실리취득 -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당시 미국과의 협상에 참여했던 고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은 회고록 《새벽의 약속》에서 이런 증언을 남겼다.
 
  〈미국 대표단 일행이 떠난 뒤 이 대통령은 우리에게 “이것이 공수(攻守)동맹이야”라고 하면서 퍽 기뻐하였다.
전날 나에게 방위조약 체결을 불평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 같은 공수동맹이 옛날에 미국과 체결되었더라면 우리도 고생하지 않았을 것을 …”
이라고 하면서 이 대통령은 기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또다른 돌발행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보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에는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This is a very fine letter)”라고만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를 다루는 법’이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이 말에 감동 받은 닉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
이 노(老)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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