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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我慢)의 반성

自由人 2019. 1. 31. 06:22


추사유배지(秋史流配址) 사적 제487호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아만(我慢)의 반성



추사(秋史)는 좀체 남을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남이 한 것은 헐고, 제 것만 최고로 쳤다. 아집과 독선에 찬 언행으로 남에게 많은 상처를 입혔다. 그가 단골로 꺼내든 카드는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실물을 봤는데’였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그만 꼬리를 내렸다. 조선에서는 그의 경지를 넘볼 사람이 없었다. 중국학자들도 그를 호들갑스레 높였다. 재료도 중국제의 최고급만 골라 썼다.

 

 

그런 그가 만년에 제주와 북청 유배를 거듭 다녀온 뒤 결이 조금 뉘어졌다. 북청 유배에서 풀려 돌아오다 강원도 지역을 지날 때였다. 길을 가는데 옥수수 밭에 둘린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흘깃 보니 늙은 내외가 마루에 나와 앉아 웃으며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내외는 길 가던 손이 불쑥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손은 물 한 잔을 달래 마시더니 잠시 쉬어 가겠다는 듯 마루에 슬쩍 엉덩이를 걸친다.

 

“여보 노인! 올해 나이가 몇이우?” “일흔입지요.”

“서울은 가 보았소?” “웬걸인겁쇼. 관청에도 못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래 이 산골에서 무얼 자시고 사우?” “옥수수를 먹고 삽니다.”

 

추사는 순간 마음이 아스라해졌다. 삶의 천진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한 세상을 발아래 둔 득의의 나날도 있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한다하는 이가 반눈에도 차지 않았다. 하지만 갖은 신산(辛酸)을 다 겪고, 제주 유배지에서 아내마저 떠나보낸 뒤, 다시 북청까지 쫓겨갔다. 이제 늙고 병들어 가을바람에 지친 발걸음을 재촉한다. 타관의 꿈자리는 늘 뒤숭숭하다. 흰 머리의 내외가 볕바라기로 앉은 툇마루의 대화, 서울 구경 한번 못하고 관청 문 앞에도 못 가봤지만, 옥수수 세 끼니로도 그들의 얼굴엔 시름의 그늘이 없었다.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가 쓴 시는 이렇다.

 

禿柳一株屋數椽 (독유일주옥수연) 두어 칸 초가집에 대머리 버들 한 그루

翁婆白髮兩蕭然 (옹파백발양소연) 노부부의 흰 머리털 둘 다 쓸쓸하구나.

未過三尺溪邊路 (미과삼척계변로) 석 자도 되지 않는 시냇가 길가에서

玉薥西風七十年 (옥촉서풍칠십년) 옥수수로 갈바람에 칠십년을 보냈네.

 

 

시를 지은 뒤 앞서의 문답을 적고,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남북을 부평처럼 떠돌고, 비바람에 휘날렸다. 노인을 보고 노인의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몰래 망연자실해졌다.”

 

 
▲ 추사가 친구인 황상에게 써준 ‘죽로지실’. ‘대나무 화로가 놓인 방’이란 뜻으로 전서의 필획을 살려 쓴 예서 작품이다.

 

 

 

▲ 세한도(歲寒圖), 세로 23㎝×가로 69.2㎝, 국보 제180호, <손창근 소장>